써 내려간 추억/Connecting the dots 11

무엇이 남았니

꿈속 같았던 3주. 정말 오랜만에 느꼈던 두근거림. 나의 존재만으로도 여전히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서 행복했어. 너의 그 따뜻했던 글자와 말들이 여전히 눈과 귀에 선해. 고마웠어. 너는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임을 뒤늦게 알고 나서는 잠깐이지만 화도 나고 배신감도 느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혼자만의 기대였는데 왜 내가 너에게 화를 내나 싶어서 피식 웃었단다. 그래, 내가 너에게 확실하게 물어보길 잘했지. 역시 생각과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인간관계에서 참 중요한 부분이다 싶구나. 안 그랬으면 서로 오해만 쌓이다가 펑 하고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너와의 3주가 끝나고 쓰라린 아픔이 남았어. 그렇지만, 그 덕에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들..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

용기 있던 시절이었다. 말도 못해, 돈 벌 곳도 정해지지 않았어, 조금도 익숙한 환경이 아니었는데 그곳으로 나를 내던졌었다. 저 사람이 정말 나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외국인이었으니까.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무기 삼아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는 정말 자유롭게 행동했다. 트와이스의 likey를 들으며 길거리에서 헤벌쭉,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화가 나면, 한국어로 온갖 욕을 해 대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슬프면 그냥 냅다 길을 걸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뭐 어때, 너희들이 나를 알아? 너희들의 언어로 나에게 뭐라고 하면 나는 못 들은 척 하면 돼. 수틀리면 돌아가면 되니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던 인생 첫 경험이었다. 이전까지는 항상 말조심하..

쓰는 사람이 된, 지워낸 그.

여느 때처럼 인스타를 보다가 지워냈던 이름을 발견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기억해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전학생으로 새로운 학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새로 사귀게 되었던 친구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데다, 성격도 무던하고 다른 학우들과 잘 어울리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학교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어른이 되면 서로 친구가 될 사이가 아님에도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마주한다는 이유 만으로도 친구가 되는 곳. 학교에서 만났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와 집이 정말 가까워서 등하교를 함께 했다. 왕따를 당하는 나와 개의치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참 많은 의지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인생에서 그렇게 큰 부분을 차지 한 사람은 아니었다. 찾으려고 마음먹어야 보일 아주 작은, 하지만 괜히 신경 쓰이는 점 하나 정도의 느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순간만큼은 나를 온전히 보여줬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랑 오래간 관계도 아니고, 엄청난 감정적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을 뿐. 아니야,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 이상이었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시간은 꽤나 흘렀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뜻이 새삼스럽게 와닿을 만큼 괜찮아졌다... 고 생각했는데, 떠올랐다. 떠오른 순간, 원하지 않던 과거 여행을 다녀왔다. 과거를 여행해봤자 좋은 게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결국 나를 데..

도서관, 나의 놀이터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작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던 날, 아장아장 걷던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밖을 나왔다. 그 추운 날씨를 견디며 동생과 향한 도서관. 7호선 장승배기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동작도서관이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컴퓨터를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이 재밌어 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책이 좋아졌는지, 그리고 도서관을 언제부터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한 권 뚝딱 끝내고 나면, 책에 몰입 했던 그 순간과 다 읽었다는 뿌듯함, 그리고 TV나 컴퓨터에서 느낄 수 없는 내 맘대로인 상상의 즐거움은 지금도 떠오른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오른편에 있던 아동서가로 향하면, 왼편에는 사서 선생님이 계시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빼곡..

강렬했던 인생의 드라마

엄청났습니다 제 인생에 이런 순간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S를 만난 건, 19년 이른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처음 만났었어요. 모임이 끝나고, 간단한 저녁 겸 뒤풀이가 있었습니다. 그 뒷풀이 자리에서 서로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었죠. 서로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테이블에 술을 마시는 건 저와 S, 둘 뿐이었어요. 평소에는 제가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소맥을 마시면서, 둘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자리가 파하고, 가게를 나가면서 서로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손을 잡았습니다. 기뻤습니다 저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매력적인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까지 적극적이라니요. 심..

교통사고

반년을 걷지 못했어요 2016년 여름이었습니다.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카페에서 커피랑 음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배달 일도 같이 하고 있었어요. 이 때는 배달 앱이 있었지만 엄청 많이 쓰이던 때는 아니어서 전화로 대부분 주문받아서 배달 가곤 했어요. 배달대행 서비스도 아니고 제가 직접 배달을 다녔는데, 나름 재미있었어요. 배달 오토바이로 성수동을 종횡무진 했었습니다 😎 해가 쨍쨍하던 6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성수역 앞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는데, 졸음운전을 하던 차가 저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다가오는 차를 보고 세우려 했지만, 이미 속도가 붙어있던 오토바이와 더 빠르게 달려오던 차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날아가서 양 무릎을 땅에 콱 찍었어..

벽장

2017년 8월 1일. 아마 이 즈음이다. 노래를 한 곡 반복하며 쓸쓸히 걷고 또 걸었었다. '오늘 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오왠 (O.WHEN) - 오늘 (Today) 외로움의 감정이 익숙하지만, 유달리 힘든 때였다. 가까이에 나를 응원해 주는 친구도 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있는데. 외국에 있어서 외로운 걸까? 사람 욕심이 많아서 그런가? 내가 어디가 아파서 그런가? ... 나름 이것저것 노력했다. 일하는 동료들과도 실컷 웃으며 떠들고, 친구와 함께 놀러도 다니고, 소개받아 알게 된 사람과 놀러 다니기도 했었다. 하지만 텅 빈 듯한 이 마음은 도저히 도저히 메워지지 않았다. 정말 무서웠다. 끝도 없는 외로움에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막막함과 후회감 어딘가 내가 고장 난 듯한, 도저히 출발점..

내 인생의 은인, 선생님

중학교 2학년. 스스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죽으면 정말 완벽한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다리가 후들거려서 뛰어내리지 못했다. 두 번, 세 번 시도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공부를 곧잘 하던 내가 갑자기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하루 종일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고 부모님은 내가 평소와 다르니 그냥 매질하기 바빴다. 담임선생님은 알아봐 주셨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싫었던 나는 멋대로 교실 구석에 남아서 훌쩍거렸고, 선생님은 묵묵히, 며칠동안 기다려 주셨다. 깜깜해진 밤 까지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봐 주신 선생님.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의 한 마디. "많이 힘..

남자답고 싶었다 2

교육학, 상담을 전공했다. 시작은, 상담을 공부해서 나처럼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공부는 정말 즐거웠다. 전공을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뿌듯하고 즐거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정말 즐거운 머리 터짐이었다. "공부만" 상담을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 사람은 그 사람 그대로 보아야 한다.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 나에게 너무 맞는 이야기 같아서 더욱 즐거운 상담 공부였다. 하지만, 학교 분위기는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불편함 그 자체였다.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운동 동아리에 가입해야 하고, MT를 가면 선배들에게 깍듯해야 하는 분위기. 말로 다 표현하기는 힘들었지만, 나는 힘들었다. 정말. 나는, 상담을 공부하면서도 결국 남자다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