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내려간 추억/Connecting the dots

쓰는 사람이 된, 지워낸 그.

오늘, 2022. 12. 20. 23:59

여느 때처럼 인스타를 보다가 지워냈던 이름을 발견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기억해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전학생으로 새로운 학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새로 사귀게 되었던 친구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데다, 성격도 무던하고 다른 학우들과 잘 어울리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학교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어른이 되면 서로 친구가 될 사이가 아님에도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마주한다는 이유 만으로도 친구가 되는 곳. 학교에서 만났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와 집이 정말 가까워서 등하교를 함께 했다. 왕따를 당하는 나와 개의치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참 많은 의지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장난치던 그때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바로 재생될 정도니까. 심지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의 웃음 포인트는 무엇이었는지까지 다 기억이 난다. 꼭 첫사랑 떠올리는 것 같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학우들은 바로 옆 중학교로 배정을 받았지만, 그와 나는 다른 쪽의 중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같은 중학교라는 사실이 새로운 환경에 닥칠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아마 그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와는 점점 멀어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잠시 동안만 같이 다녔을 뿐 그 뒤로는 같이 다니지 않게 되었다. 반이 달랐기 때문도 있겠지만, 머리가 커 가면서 서로 어울리는 무리가 나뉘었다. 그는 큰 키와 그 자신만의 분위기로 소위 '논다' 하는 친구들과 함께 다녔고, 나는 여전히 쭈구리로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그 이후로 그와는 꽤나 많이 멀어졌다. 그나마 인터넷 메신저로 간간히 대화하긴 했지만, 그건 그가 가끔 술을 마시거나 누군가에게 하지 못할 여러 일들을 벌였을 때뿐이었다. 항상 외로웠던 나는 그 친구의 연락이 어떤 내용이었든지 항상 반가웠지만, 그에게 나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을 때 연락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또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괴롭히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울먹이는 나를 그가 보았다.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했다.
"아, 아니."

그 친구는 멀찍이서 나를 보며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나는 흘리던 눈물이 창피해 소매로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때는 그가 멀리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얼마 뒤, 나는 그를 내 인생 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그는 나를 괴롭히던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물론, 내가 그의 인간관계에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를 본 그 기분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겉으로는 멀어진 사이였다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 속에서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는 여전히 나에게 간간히 자기 과시를 위해서 연락해 왔지만, 이제는 연락이 반갑지 않고 무서웠다. 말도 못 하게 무서웠다. 그리고 고통스럽던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겨우 정말로 지워버릴 수 있었다.


지금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있다. 책도 여러 권 내고 강의도 다니면서 활발히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심히 인생에서 지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이름이 나에게 새겨져 버린 기분이다. 지금 나 마음이 너무 괴상하고 이상하다.
내가 그에게 축하하다는 마음을 가지자니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초라하다. 밉다는 마음을 가지자니 속이 좁은 사람 같다. 그가 저런 성취를 달성하기까지 많은 인내와 노력을 쏟았을 텐데, 인정하기가 싫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들었었을까, 나를 욕하는 말에 너는 같이 욕했을까, 괴롭힘 당하던 나를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아무튼, 정말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그의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인생에서 애써 지웠던 그는,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늘.
litt.ly/o.n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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