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내려간 생각/기록 21

지금 그 곳은

자라오면서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이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나 기억이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동네들, 그리고 성인이 돼서 내 선택대로 이사를 다니는 요즘까지. 아른거리는 그 순간 그 때 가끔씩 혼자 산책하거나, 낮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을 때, 옛날에 살았던 집, 그리고 동네들이 아른아른거려요. 연탄을 때던 집에서 살았을 때, 연탄아궁이 속의 연탄이 새빨갛게 올라오던 그 뜨거움. 집 앞에 굴러다니던 연탄재. 그 골목의 옆집 형,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았던 아련한 기억들. 바로 앞에 있던 목욕탕 집 딸과 초등학교 같은 반이 되어 함께 다니던 등하굣길. 야자를 끝내고 꼭 우리 집 앞까지 같이 와 주던 소중한 친구들과 걷던 동네. 그리고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지내던..

나, 기대

다시 한번, 기대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는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는 왜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게 될까요. 내 연인이니까 당연히 이렇게 해 줘야지, 친구라면 이렇게 해야지, 단순하게 듣고 싶은 말이 있을 수도,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행동했으면. 등등. 이런 기대를 가지는 주체는 바로 '나'. 내가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이 있었던 것이고, 바라는 점은 사실 나의 '욕구' 였더라고요. '상대방을 통해서' 만족하고 싶고, 충족하고 싶은 나의 '욕구'. 이것이 '기대' 라고 생각합니다. 기대는 나의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나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 충족하려 하는 것인데 나의 욕구를 상대방이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까운 사이에서의 갈등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이 기대를 어떻게 하면 잘 소..

친구, 기대

친구와 환상 친구관계에 굉장히 큰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친구, 내 말은 어떤 말이든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 등등... '친구관계에 대한 환상' 이라고 표현해 놓기는 했지만, 환상 속에만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 실제로 저런 친구들을 가진 분 들도 계시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환상이었다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 보았어요. 물론 과거를 회상해보고 원인을 찾아본다고 해서 지금의 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굳이 이 환상에 대한 이유를,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보통 청소년기를 지나가면 또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해 지는 시기가 옵니다. 저는 그 시기에 친구 관계가 굉장히 힘들..

이 세상은 결과가 전부야_2

정말 결과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산 정상에 올라 멋진 경치를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산을 오르기로 마음먹고 등산로 앞에 섰답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산 위를 보니 까마득했어요. 대체 언제 올라가지. 그냥 올라가지 말까. 족히 세 시간은 걸려 보이는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그 때,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벌써 정상을 다녀 온 거겠지.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한걸까.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산 정상에 올라가는건 당연히 힘들거에요. 산을 오르는데 있어서 '산 정상' 만 바라본다면, 고통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이 때, 제가 산을 올라가는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면 또 달랐을거에요. 산 속의 시원한 공기, 푸르른 나무와 풀들, 새 소리, 흙을 밟았을 때의 ..

이 세상은 결과가 전부야_1

"이 세상은 결과가 전부야. 넌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어?" 30년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의 아버지에게. 초등학교 때, 밤을 새서 수학 익힘책 한 권을 통째로 풀어도 당연한 것이었고, 중학교 입학할 때 전교 7등을 해도, 고등학교 때는 고작 그런 학교를 붙었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 실제 수백시간이 넘는 봉사활동을 하며 우수 자원봉사자증과 우대증을 받아도 '봉사활동을 해서 남는게 뭐 있다고, 고작 너 취업 하려고 스펙 쌓는거면서 잘난 척 하지마.' 우리 집은 항상 나에게 이런 식이었다. 지금까지 무슨 노력을 했든지,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내 아버지 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결과' 를 정말 중요하게 여기죠.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몰찬 이 사회 안에서는 많은 부분이 ..

꾸준함에 대하여

꾸준함 한동한 '나'에 대해서 집중하면서 얻은 키워드 중 하나가 '꾸준함'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분명 저는 꾸준함을 잃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쳇바퀴처럼 집-직장-집-직장... 이런 꾸준함 말고요, '나'를 위한 꾸준함이 한동안 없었어요. 행복했던 순간들,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그 안에는 사소하더라도, 꾸준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일을 마치면 집에 바로 가지 않고 한참 산책을 하고 들어간다던지, 마트에 매일 같이 가서 생필품 시세를 찾아보거나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매일 같이 운동을 하러 가고, 매일 저녁 9시만 되면 집을 청소하는 것 등등. 꾸준함이 있던 삶 속에는 자연스레 성취감도, 하루하루에 대한 충실감, 보람 등이 따라왔었어요. 아 내가 오늘도 열심히 했구나. 꾸준하다는..

오랜만에, 그리고 요즘

블로그에서 손을 잠시 뗀지 한 달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걸리지 않으면 친구가 없는 것이라는 코로나도 걸려 보고, 다시 한 번 삶의 의욕이 바닥을 찍고 이제야 조금 괜찮아 졌습니다. 바닥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려갈 곳이 있었더라구요. 😄 어려서부터 여러가지의 막연한 꿈 중 하나가 책 만들기, 글쓰기 였어요. 책을 참 많이 좋아해서 서너살 된 동생의 손을 잡고, 눈길을 파헤치며 동작도서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했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냥 관심가는 책 들은 뭐든 집어 보던 때 였습니다. 학습 만화책부터 소설책, 시집, 에세이에 이해도 못할 프로그래밍 책도요. 그 와중에 성교육 책을 보고 두근거리며 동생을 저 멀리 두고 책장 한 구석에서 몰래 보던 귀여운 제 모습도 생각이 납니다. 그 ..

사람이 좋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외로움'이다. 단순히 옆에 연인이 없어서 외로운 외로움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도 있겠지만,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떠올려보면 모두 다 '외로움'과 관련 있는 일들이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내 특징도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외로움이라는 결핍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저는 친한 사람에 대한 욕심도 없고, 혼자가 굉장히 편해요." 상담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가 정말 정말 부러웠다. 아, 나도 혼자가 편했으면 좋겠다. 사람에 대한 욕심도 없었으면 좋겠다. 외롭다고 하지만 외로워하면서도, 다른 이중적인 모습도 있다. 항상 인간관계를 좁..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이 너무나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이밍 좋게 친구가 무료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려주어서 어제 바로 상담을 신청했고, 오늘 첫 상담을 받고 왔습니다. 첫 상담이니 만큼 구조화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썼습니다만, 벌써 너무 기대가 됩니다. 세상에 오늘을 빼고 5회기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담이라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상담자든 내담자든 큰 에너지가 필요한 쉽지 않은 작업이고, 상담을 받는 입장에서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이렇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창구를 근처에서 찾게 되었네요.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실 '코너에 몰려있던' 상황은 지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확실했는데, 뭔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순간이..

S에게

S에게. S야, 안녕하니. 우리가 만난지 벌써 일년이야. 처음 너와 만났던 자리. 첫눈에 반했어. 너를 만나기 전 까지는 ‘첫눈에 반한다’ 라는 말은 믿지 않았어. 말도 안되지. 첫 눈에 반한다는건 어디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지 현실에 있겠어? 하지만 너를 만난 그 때, 난 변했어. 따뜻한 조명 아래, 많은 사람들로 정신없던 그 자리. 나는 너의 목소리만 들렸고, 너의 웃는 얼굴만 보였어. 너와 나의 잔이 부딪힐 때 마다 난 행복했고, 너도 나와 같길 바랬어. 그 자리를 나서려는 순간, 너는 내 손을 잡았어. 너도 나와 같은걸까? 꿈인 줄 알았어.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착각을 하는걸까. 꿈이라면 깨지말자, 나도 손을 꽉 잡았지.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어. 내가 이사하던 날, 너는 나에게 곧 따라간다 했..